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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석학

4th. [영화 ‘버닝’ 리뷰] 멈춤 성장 시대의 한국남자를 이해할 단서 유아인과 연상엽













<노을지는 파주의 저녁은 혜미가 아프리카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온 아프리카 원주민의 노을지는 저녁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헤미가 아니었다면, 파주에 사는 유아인과 반포에 사는 연상엽이 만날 일이 있었을까?

혜미는 대출을 받아서 성형수술을 할 정도로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아 아프리카에 다녀올 정도로 치열하게 삶을 사는 청춘이다. 그녀의 아프리카 여행은  의도치 않게 유아인과 연상엽을 이어주는 결과를 낳는다.

 셋이서 파주에 있는 유아인의 집에서 모였을 때, 혜미는 노을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며 아프리카 부족민의 춤을 재현한다. 이 춤을 추는 혜미의 느릿한 리듬감은  영화 초반 핸드폰 가게 앞에서 빠른 리듬에 몸을 흔들어야 하는 혜미의 운명과도 같은 템포와 대조를 이룬다. 아주 천천히 영혼을 달래는 듯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혜미에게 유아인은 고작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은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야” 라고 말하며 여성을 보는 하층민의 가부장적 시각을 드러낸다. 유아인은 연상엽과의 경쟁심에서 또는 혜미가 걱정되는 마음에서 조언을 한 것이지만, 혜미는 유아인을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너도 어쩔 수 없는 한국남자’ 구나 라고 생각하며 떠나지 않았을까. 

  혜미가 잠이 든 사이, 유아인과 연상엽은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는다. 보통 남자들이 결속할 때는 여자를 대상으로 시시껄렁한 성적 농담을 주고 받으며 서로 같은 편임을 확인하기 마련인데, 유아인은 연상엽에게 혜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삶에 시큰둥한 연상엽은 유아인의 고백을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은 비닐 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허세를 부린다. 연상엽은 경쟁자인 유아인을 누르기 위해 블러핑을 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연상엽의 비닐하우스 얘기를 들은 그날 밤, 유아인은 비닐 하우스가 불타는 꿈을 꾼다. 그리고 카메라는 겁에 질려 슬픈 무표정한 한 아이를 비춘다. 
 어린 아이들은 무서운 얘기를 듣거나 어떤 상징을 자기화하고자 할 때 꿈을 꾸는 경우가 있다. 이는 너와 나의 구별이 아직 안되어 비판적 사고와 판단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사회가 집단 무의식을 주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유아인은 비닐하우스가 불타는 꿈을 꾸고는 연상엽의 허세가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비닐 하우스 연쇄방화범을 잡기 위한 추격이 시작된다. 
 
유아인은 모른다. 자신의 누추한 트럭이 부촌인 연상엽의 동네에서 얼마나 눈에 띄는 지. 그런데도 잠복을 거듭하고  놓치고 따라 잡기를 반복한다.

                                                              <혜미를 찾아서 그녀가 마임을 배운 교습소를 찾아가는 유아인은 익명의 마스크 속에서 혜미를 찾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유아인이 연상엽이 혜미를 사라지게 한 범인이라고 확신하게 되는 계기는 자신은 혜미네 집에서 본 적 없는 고양이를 연상엽네 집 주차장에서 이름을 불러내서 찾았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혜미와 유아인이 우연히 만나서 술자리를 갖게 되었을 때, 감독은 귤을 먹는 마임을 하는 혜미를 통해 유아인에게 일러준다. 너희 세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세다가 아니라 유에서 무를 흉내내는 세대라고 말이다. 마술과 트릭 같이 진짜 같은 가짜를 연출하는데 환호한 나머지 진실을 알고자 힘쓰지 않는 그 어리석음을 경계하라고 말이다.                                                                                                                                                                                                                                                                                                                                                                                                        이쯤에서 연상엽이 혜미를 사라지게 한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관객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추리를 해보자. 그 사실은 아주 단순하다. 유아인은 혜미와 같이 만나자며 연상엽을 불러낸다. 연상엽이 혜미를 없앤 장본인이라면 혜미와 같이 보자는 유아인의 의도를 믿었겠는가. 그가 범인이라면 무방비 상태에서 유아인을 만났을리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