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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우스 매듭

 부들부들 팔을 떨면서 아령을 드는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있습니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세친구'에 나오는 장면처럼 말이죠. 저역시 그랬습니다. 어젯밤 고열량 칼로리를 섭취한 것을 후회하며 거울 앞에서 망연자실하는 여자도 있겠죠. 미래에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으로 변화하려면, 지금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꾸준히 자기계발에 임해야겠죠.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모습을 위해서 말이죠.

 자기부정은 사실 특별한게 아니었습니다. 개인만이 아닙니다. 국민소득 만불 시대에는 2만불을 향해, 2만불 시대에는 3만불 시대를 향해 국민 개개인이 허리띠를 졸라메며 '극기'라는 덕목을 추구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내적으로는 '국가적 자부심'이 외적으로는 '국민적 자존심'이 '함양'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대는 천천히 변하여, '자기 긍정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상전벽해의 변화일 것입니다. 저는 앞선 세대가 극기를 통해 과거를 극복해온 세대라 생각합니다. 개인이 추구할 덕목으로서 자기부정이나 극기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집단이 자기부정을 한다는 건 어떨까요?

파랑색-빨간색-핑크색으로 잠바를 갈아입는 당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집권결과가 너무 처참해서 '자기긍정 시대'에 자기부정을 계속해야하는 비극은 일견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반복되는 소극에 반복적으로 동일한 투표를 하는 앞선 세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다른 색깔을 뽑았으니 각기 다른 투표라고 봐야하는 걸까요?'

만약 그들이 동일한 정치집단에 투표를 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4년 마다 규칙적(regularity)으로 투표한다고 보는게 맞을 것입니다. 그들을 규제(regulate)또는 규율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열차가 연착하면 플랫폼의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약속시간에 늦고 변명을 해야하니까요. 아주 더운 여름이고, 냉방시설도 작동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그렇겠죠. 만약에 열차가 다른 목적지에 승객을 내려주면 어떻게 될까요? 4년에 한번 하는 투표는 목적지가 다른 사람들을 한꺼번에 한 곳에 내려줍니다.

현재 파란 잠바를 입는당을 보겠습니다.
당론과 반대되는 소신투표를 했다는 이유로 비판 받은 의원이 있습니다. 집단적으로 결정된 의사에 따르는 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면 개인으로서는 어떤 윤리를 선택해야 할까요? 물론 상황이 진중하므로 돌출행동이 허용되는 범위도 좁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자기부정은 언제 끝나게 될까요? 타인으로부터 긍정을 얻으면 끝이 날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타인의 평가 이전에 변화된 자신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다'라고 믿어야 합니다. 일종의 자기기만이지요.

<고백하기 전에 들이 쉬는 모습, then exhile>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라는 사랑 고백말은 알면서 속아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당정치인이 하는 이 말은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자를 부정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은 자기기만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선거공약은 빌공자의 空약이 됩니다.

타자를 대표하는 정치인을 우리자신의 대표로 뽑아야 할까요? 그전에 스스로를 대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인을 자신의 대표라고 착각하면, 4년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속고 살았네'라는 후회가 들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