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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손에 스마트폰 크기의 수첩 같은 것을 들고 집에 왔다. "이거 가져가세요" 사무실을 나올 때 직원이 주었다. 받아온 것은 수첩이라 하기에 애매한 점이 있었다. 분절된 종이를 실로 꿰거나 본드로 접착 시킨 게 아니라 앞 장과 끝 장이 이어지도록 부채처럼 종이가 접힌 형태였다. 인쇄된 내용도 예전에 의료보험증과 비슷하게 칸칸이 나뉘어져 날짜 같은 것을 쉽게 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수첩의 앞 부분에는 디가우징한 날짜를 기록하게 되어있었고, 뒤 쪽에는 이메일아이디와 사이트의 패스워드의 변경 이력을 일목요연하게 나열할 수 있게끔 되어있었다. 일종의 저널이었는데, 엑셀시트를 손으로 쓰도록 만든 용도인 셈이었다. 가만히 들여다 보다 무얼 적을지 골똘이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운동선수의 등번호와 이적료?, 좋아하는 영화제목의 개봉일과 관객수?' 등등 여러가지를 생각하는데, 마지막 장에 [악플 미리보기]란이 있었다. 200자 정도를 적을 수 있는 칸으로 구분되어 있고 끄트머리 마다 <악플러에게>라고 찍혀있었다. 

'아무래도 정독한 책 제목과 날짜를 쓰는 게 낫겠어' 프랑스 대통령이 외규장각 의궤를 영구임대에서 반환으로 전격결정한 날이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머리 속에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 이순신, 난중일기, 이방원, 도승지, 연산군, 광해군 등이 떠올랐다. 대동강변에 좌초한 프랑스 함선과 강화도 앞 바다의 미국, 영국의 군함과 상선에 대한 생각은 해군제독, 워털루 전쟁, 나폴레옹과 그의 대관식을 그린 화가, 깃발을 든 전위적인 여성, 처칠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증기선을 최초로 발명한 왓슨은 셜록홈즈와 애거사 크리스티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미시시피 강과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을 쓴 작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묘비명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가 생각을 고치게 되었다. 

'지구가 낳은 정치가와 예술가의 작고한 날짜를 적는 게 더 낫겠어'
누구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볼까 고민하던 중 이와같이 기록을 적는 일이 '양념치킨의 양념장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와 같은 허무한 생각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수첩을 접어서 볼펜과 가지런히 두었다. 수첩의 겉면에는 "억과 각의 회생"라는 단어가 큼지막히 새겨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