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4. 손에 스마트폰 크기의 수첩 같은 것을 들고 집에 왔다. "이거 가져가세요" 사무실을 나올 때 직원이 주었다. 받아온 것은 수첩이라 하기에 애매한 점이 있었다. 분절된 종이를 실로 꿰거나 본드로 접착 시킨 게 아니라 앞 장과 끝 장이 이어지도록 부채처럼 종이가 접힌 형태였다. 인쇄된 내용도 예전에 의료보험증과 비슷하게 칸칸이 나뉘어져 날짜 같은 것을 쉽게 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수첩의 앞 부분에는 디가우징한 날짜를 기록하게 되어있었고, 뒤 쪽에는 이메일아이디와 사이트의 패스워드의 변경 이력을 일목요연하게 나열할 수 있게끔 되어있었다. 일종의 저널이었는데, 엑셀시트를 손으로 쓰도록 만든 용도인 셈이었다. 가만히 들여다 보다 무얼 적을지 골똘이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운동선수의 등번호와 이적료?, 좋아.. 더보기
3. 그들은 제각각인 모습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공통적으로 한 손에 무언가 들고 있었는데, 햇빛을 반사해서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늘어선 줄 끄트머리에 다가가 은근 슬쩍 무리에 끼어들었다. 서서히 줄이 줄어들고 사무소 가까이 왔을때, 그들이 들고 있는 납작한 은색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아니 우리들은 하드디스크를 입장권처럼 들고 그 곳에 들어가게끔 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사무실 한켠에 하드디스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파티션으로 구획된 안쪽에는 누군가 열심히 하드를 뜯어서 암막처리된 자기장 안으로 디스크를 밀어내고 있었다. "디가우징 할 거 없으세요?"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내게 물었다. "아.. 아뇨 전 그냥.." 말을 이어가려는데 그는 내게 저쪽으로 가라는 듯 방향을.. 더보기
2. 집 앞 빈 건물에 선거사무소가 개설되었다. 철거고지가 된지 3개월이 지났을때였다. 내리막 길에 걸터 앉은 4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주인이 바뀌면서 기존의 입주자들이 건물을 비운 상태였다. 고양이들이 오가며 건물을 휘저었다. 한산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의 상점이 들어있던 위치에 사무실 칸막이가 들어서고 간이 전기시설이 가설 되었다. 당명을 적은 현판도, 기호도 없어서 선거사무실이 맞나 싶지만 왕래하는 사람들 면면을 들여다 보면 사전선거운동 기간 전에 물밑 작업을 하는 듯 보였다. 짙고 푸른 바다에 먹을 들이 듯한 색깔의 점퍼로 통일하되 바지와 운동화는 가볍고 단촐했다. 지적편집도를 들여다 보며 동네를 파악하는 모습이었다. 이 동네를 말할 것 같으면 거대한 두 오름이 대로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는 .. 더보기
1. 매일 갈 곳 없이 집을 나섰고, 해가 떠 있으면 현기증을 느꼈다. ...낮은 천장과 좁은 문을... 스스로는 정확한 궤적을 그리며 목표물을 향해 나아간다고 같아 보였지만 빨리 걷지 않으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릴까 더욱 속도를 낼 수 밖에 없었다. 흐르는 시간은 축적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휘청거리는 사이에 손아귀에 쥔 모래가 빠져나간 자리에 희미한 손금만 확인 할 수 있었다. 자연세계 내벽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는 시점이었다. 잘 닦인 도로, 번쩍이는 간판, 드높은 건물 사이를 성큼성큼 걸었지만 자신과는 어떤 연관도 이어지지 않는 곳이라 느껴져서 적당한 장소를 찾으려면 골목 사이를 파고들어야 했다. 큰 길을 건너기 위해 육교에 올랐다. 산등성이에 뾰족뾰족 하게 난 집들과 집들이 이어져 있는 풍경.. 더보기
고르디우스 매듭 II 예전에 봤던 영화를 우연히 다시 보다가 자기의 현실에 꼭 맞는 장면을 보게 되는 일은 우연처럼 또는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나치 시절 자행된 악을 규명하기 위해 필생의 저작을 일군 정치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더 리더'라는 영화의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다시 불리워집니다. 제가 인상깊게 본 장면은 영화말미에 여주인공이 형기를 마치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 나서지 못하고 가지런히 쌓인 책 위에 올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이었습니다. 감독은 책을 4등분 된 모습으로 쌓아둡니다. 저는 여기서 4분면을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시대의 악을 규명하느라 지식의 매트릭스에 갇힌 지성인을 은유하는 장면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곰곰히 생각해보니 다른 측면으로도 생각되었습니다. 선거를 앞두었으니.. 더보기
고르디우스 매듭 부들부들 팔을 떨면서 아령을 드는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있습니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세친구'에 나오는 장면처럼 말이죠. 저역시 그랬습니다. 어젯밤 고열량 칼로리를 섭취한 것을 후회하며 거울 앞에서 망연자실하는 여자도 있겠죠. 미래에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으로 변화하려면, 지금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꾸준히 자기계발에 임해야겠죠.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모습을 위해서 말이죠. 자기부정은 사실 특별한게 아니었습니다. 개인만이 아닙니다. 국민소득 만불 시대에는 2만불을 향해, 2만불 시대에는 3만불 시대를 향해 국민 개개인이 허리띠를 졸라메며 '극기'라는 덕목을 추구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내적으로는 '국가적 자부심'이 외적으로는.. 더보기
5th. [영화 ‘버닝’ 리뷰 마지막 편] N 세대의 익명성 속에 숨은 청춘 5G 시대, N으로 상징되는 세대의 연결은 가능한 지 묻는 영화 버닝 연상엽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걸까? 아프리카에서 항공편이 연착되지 않아서 혜미를 만나지 않았다면, 비닐 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면, 포르쉐가 아닌 국산 자동차를 소유했다면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을까. 반포로 상징되는 연상엽의 안온한 세계에서 그는 미술 전시회장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만찬 비슷한 식사를 한다. 유아인에게는 그가 향유하는 삶의 양식은 정말 수수께끼 같았을 것이다. 혜미를 매개로 연상엽의 벙커사회와 유아인의 날선 사회가 우연히 만난다. 가진 게 많고, 지킬 게 많으면 자신이 소유한 것을 빼앗길까 노심초사 하는 게 일반적인 사람의 심리다. 그래서 부촌에 가보면 그들만의 세상에서 높다랗게 담을 쌓고 방범 .. 더보기
[추천 책] 다가오는 AI 시대, 당신의 자녀를 지식노동자로 키우고 싶다면 읽어야 할 A must-read book! 전문가의 예측에 따르면 노동조건이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산업화 다음 정보화 시대를 거쳐 초연결 사회에서 인공지능이 인력을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세대에게 주어지는 과업은 잉여인간이 되어도 본인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의 시대적 과제를 아는 인간은 어쩌면 불행할 지 모른다. 허나 행복을 느끼고자 진짜 현실에 눈 감는다면 틀린 사실을 믿고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왕 사는 인생, 자신의 믿음과 생각이 현실과 일치한다면 나름대로 유의미한 삶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는 자유롭고 안전한 사회 중 하나로 꼽힌다. 그래서 틀린 생각을 갖고 살아도 입 밖으로 꺼내거나 남을 해코지 하지 않는 이상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다. 사실 틀린 생각이란 게,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이 틀렸다는.. 더보기
4th. [영화 ‘버닝’ 리뷰] 멈춤 성장 시대의 한국남자를 이해할 단서 유아인과 연상엽 헤미가 아니었다면, 파주에 사는 유아인과 반포에 사는 연상엽이 만날 일이 있었을까? 혜미는 대출을 받아서 성형수술을 할 정도로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아 아프리카에 다녀올 정도로 치열하게 삶을 사는 청춘이다. 그녀의 아프리카 여행은 의도치 않게 유아인과 연상엽을 이어주는 결과를 낳는다. 셋이서 파주에 있는 유아인의 집에서 모였을 때, 혜미는 노을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며 아프리카 부족민의 춤을 재현한다. 이 춤을 추는 혜미의 느릿한 리듬감은 영화 초반 핸드폰 가게 앞에서 빠른 리듬에 몸을 흔들어야 하는 혜미의 운명과도 같은 템포와 대조를 이룬다. 아주 천천히 영혼을 달래는 듯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혜미에게 유아인은 고작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은 창녀들이나 하는.. 더보기
3rd. ‘버닝’의 세 주인공, 결핍 세대의 missing link를 찾는 단서 ' Subject : 결핍세대의 갈등 영화 ‘버닝’의 세 캐릭터가 추구하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 이들 셋 모두 자신에게 없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여주인공은 존재하지 않는 귤을 실재하는 것처럼 먹는다. 연상엽은 본인에게 필요없는 ‘삶에 대한 노력’을 찾으려 한다. 유아인에게 없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실 이것은 유아인에게 원래 없는 것이고 그에게 속해있지 않은 것이지만 유아인은 이것이 응당 자기의 것이라고,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빠져 있는 무언가를 찾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부모 세대와는 다른 의미의 결핍 세대이다. 유아인 본인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머니의 모성, 여자친구와의 사랑 등 인간의 성장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자 가치들이다. 하지만 감독이 얘기하고자 하는 유아인에게.. 더보기